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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힐 만하한 사람에게는......

goldgate 2015. 1. 2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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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과 리더십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능력'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인재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개 관습적인 인재관, 즉 겉으로 보이는 좋은 학벌과 경력 혹은 사회적 지위와 조건이 곧 실력이자 능력이라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관습과 인습에 얽매여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절대로 '훌륭한 인재'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겉에 드러난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숙종이 재위하던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조선 최고의 갑부였던 역관(譯官) 변승업의 집안을 무작정 찾아간 허생의 사례를 들어 얘기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이야기는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기인『열하일기』의「옥갑야화(玉匣夜話)」편 '허생전'에 나온다. 허생에 관한 이야기는 박지원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도중 옥갑이라는 곳에서 윤영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픽션(허구)이 아닌 논픽션(실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변승업의 밀양 변씨 가문이 나라 안의 제일가는 부자가 된 유래가 허생이라는 선비에게 있었다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변승업의 할아버지가 허생이라는 인재를 알아본 안목이 있어서 크게 재물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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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은 남산골의 가난한 선비인 허생이 마누라의 등쌀에 못 이겨 10년 독서할 뜻을 접고 장사를 해볼 요량으로 당시 한양 제일의 부자 변씨를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변씨를 만난 허생은 길게 절을 한 후 앞뒤 설명도 없이 무조건 만 금을 빌려달라고 했다. 당시 그의 행색은 비렁뱅이나 다름없었다. 허리에는 실로 만든 띠를 둘렀는데 술이 모두 뽑혀 있었고, 꿰맨 가죽신은 뒷굽이 내려앉아 있고, 다 망가진 갓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더욱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연신 훌쩍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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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만 본다면 만 금이 아니라 엽전 한 닢도 빌려줄 가치가 없는 몰골이었다. 그런데 변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만 금을 허생에게 선뜻 건네주었다. 만 금을 받은 허생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황당한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변씨의 자식들과 손님들은 기겁을 하며, 그 사람을 잘 아시느냐고 묻자 변씨는 태연하게 모른다고 답변했다. 이에 자식들이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비렁뱅이에게 헛되이 돈을 쓰느냐고 하자, 변씨는 이렇게 답변했다.


"너희들이 알 수 있는 이치가 아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뜻을 거창하게 떠벌리고, 자신이 신용과 의리가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려고 한다. 또한 얼굴빛은 비굴하며, 말은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옷과 신발은 비록 남루하지만 말이 간략하고 눈매가 자신만만하고 얼굴에는 비굴한 빛이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서 그는 재물을 얻기 전에 이미 스스로 뜻을 세운 사람이다. 아마도 그가 계획하고 있는 방법 역시 작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주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이왕 만 금을 줄 바에야 이름은 물어보아 무엇 하겠느냐."

변승업의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냥 허생에게 만 금을 내준 것이 아니라,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으로 장차 허생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해 투자를 결심한 것이다.

 

 

사람을 얻으면 부와 명성이 함께 따라온다!

변승업의 할아버지에게 만 금의 재물을 빌린 허생은 처음 경기도 안성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과일을 매점해 판매하는 도고 활동으로 열 배의 이익을 남겼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가 망건의 재료인 말총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다시 열 배의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물은 허생이 애초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세운 큰 계획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그 후 허생은 전라도 변산의 도적 수천 명을 모아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를 지어 얻은 쌀 수천 석을 큰 흉년이 든 일본의 개항지 장기도(長崎島 : 나가사키)에 내다 팔아 은 백만 냥을 거두었다. 당시 조선은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교역을 일절 금지하고 있었다.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거의 400년이 지났는데, 여태껏 다른 나라와는 배 한 척 왕래한 적이 없다."고 개탄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는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유리한 조건을 활용해 다른 나라와 교역한다면, 경제적인 이득은 물론 외국의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풍속과 문화를 물어 세상을 개화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게 박제가의 주장이다. 따라서 나가사키와 직접 교역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선비 허생의 행동은 당시의 시각에서 보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허생은 바닷길을 열어 외국과 통상할 것을 역설한 박지원과 박제가 등 북학파의 개혁사상을 실천에 옮긴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직접 교역해 막대한 재물을 취한 허생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뜻을 조금 시험해보았다면서 장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무인도를 떠나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왔다. 그렇게 하고도 10만 냥이 남았다. 허생은 이때서야 남은 돈을 가지고 변씨를 찾아갔다. 그리고 전날 빌려간 만 금의 열 배가 되는 10만 냥을 갚았다. 이후 변승업의 할아버지와 그 집안인 밀양 변씨는 다른 역관 부자, 곧 남양 홍씨, 인동 장씨, 천령 현씨, 우봉 김씨 등의 가문을 뛰어넘는 조선 최고의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박지원 또한 "변승업의 조부 때에는 재산이 몇 만 냥에 지나지 않았는데, 일찍이 허씨 성을 지닌 선비의 은 10만 냥을 얻어서 드디어 나라 안의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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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돈은 자신의 노력으로 벌 수 있지만 큰 돈은 다른 사람이 벌어준다."는 말이 있다.

만약 변승업의 할아버지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나 조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평범한 안목밖에 없었다면, 밀양 변씨 가문은 수많은 조선의 부자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허생을 알아본 변승업의 할아버지의 안목과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밀양 변씨는 숙종 시대에 들어와 나라 안의 최고 부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더욱이 변승업의 집안과 허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변씨 집안은 단순한 부자가 아닌 '안목과 식견' 그리고 '인정과 의리'를 두루 갖춘 부자라는 명성까지 얻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역관 부자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변승업의 집안이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사람을 제대로 얻으면 재물뿐만 아니라 큰 명성까지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찍이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쳤던 다음과 같은 '고전 속 한 마디'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수 백 수 천 번 되새겨 봄직 하다.

一樹一穫者穀也(일수일확자곡야) 一樹十穫者木也(일수십확자목야) 一樹百穫者人也(일수백확자인야)

"
하나를 심어 하나를 거두는 것은 곡식이고,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는 것은 나무이며, 하나를 심어 백을 거두는 것은 사람이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覇者 :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만든 관중이 지은 정치사상서인『관자(管子)』의 '권수(權修)'편에 나오는 말이다.